2008년 10월 5일 일요일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스님, 지금처럼 수행을 하면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한 노보살님이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하시다가 물으셨다. 마음을 내어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무엇이 되는 걸까?’ ‘내가 지금 진정으로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무언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수행을 하다 보면 공부가 되든지 아니면 좋은 업이라도 쌓이겠지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막막해 지고 뭐가 뭔지 감을 잡지 못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이 옳은 건지 아니면 이렇게 해서 무엇하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장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시작은 했는데 금방 포기하기는 그렇고, 공부는 해야 될 것 같고 해서 그냥 관념적으로 수행에 임하기도 한다.

“글쎄요, 무엇이 된다기 보다는 그냥 자신을 좀 더 알게 되겠지요”

“그러면 만약 내가 나를 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보살님은 처음 무엇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셨나요?”

“잘 살아보고 싶어서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더 잘 안다면 그만큼 잘 살아가겠지요”

“나를 잘 아는 것하고 잘 사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노보살님은 벼르고 오신 것 마냥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셨다.

“보살님, 제가 한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 촛불이 켜져 있다고 합시다. 촛불이 켜져 있으려면 최소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아마 성냥, 초, 심지, 공기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예, 맞습니다. 촛불이 켜져 있으려면 최소한 성냥이나, 초, 심지, 공기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더 자세히 언급하면 초를 만드는 파라핀이나 초를 만드는 공장, 사람 등도 필요하지만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이 네 가지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만약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있지 않으면 촛불이 켜져 있을 수 있을까요?”

“없어요. 전부 다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촛불이 켜져 있기 전에 그 불꽃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요, 오긴 어디서 와요. 성냥에서 만들어져서 심지에 옮겨 진 것이지요.”

“그럼 이 촛불을 입으로 불어 꺼트리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없어지지요”

“촛불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켜져 있으면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촛불은 켜져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즉 공기와 초와 심지가 있을 때만 촛불은 존재하는 것이지 그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촛불은 어떤 조건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절대로 자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변하면 사라집니다. 촛불은 그냥 켜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초를 태우며 존재합니다. 매 순간 연소되는 초가 있기에 촛불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촛불은 매 순간 항상 새로운 촛불입니다.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 지고 있지요. 이것을 불교 용어로 무상(無常)이라 합니다. 또 촛불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체가 없다해서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고 합니다. 대상과 그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그리고 대상과 감각기관이 만나 생겨나는 식(識), 이 세 가지를 조건으로 ‘나’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 현상이 만들어져 지속된다고 합니다. ‘나’는 촛불처럼 그 실체가 따로 있어서 어디서 왔거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조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조건들이 어우러져 접촉(觸)하게 되면 식(識)이 발생하고 이때 느낌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이 느낌의 장난이 지금의 ‘나’가 된다고 합니다.

말이 좀 길어 졌습니다. 즉 명상 수행을 통해 나를 안다는 것은 지금 ‘나’라고 여기는 것이 이렇게 조건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느낌과 감정, 생각 등도 마찬가지로 여러 조건을 통해 단지 발생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조건과 원인이라는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평소 자신을 대하면 불만족스러운 여러 느낌이나 상태 또한 조건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고 크게 영향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만큼 마음은 가벼워 지겠지요. 나를 휘몰아 치는 여러 욕망과 감정 또한 조건을 통해 만들어 짐을 알면 그 순간 더 효과적으로 절제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잘 알며 절제를 잘 하고 산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

“명상을 한다고 바로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숫타니 파타>에 나오는 한 구절 소개시켜드릴게요.”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위대하신 스승님께 여쭙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보아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에 듭니까?”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 어떠한 갈애가 안에 있더라도 확실히 자각하여 그것들을 제거하도록 공부하십시오. 안으로 뿐만 아니라 밖으로 어떠한 현상이든 잘 알 수 있더라도,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사람에게 그것은 소멸이라 불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라고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받더라도, 자기를 내세우는 허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안으로 평안해야 합니다. 밖에서 평안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안으로 평안하게 된 사람에게는 취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버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바다 한 가운데에서 파도가 일지 않고 멈추듯, 멈추어서 결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든 파도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숫타니 파타>, 전재성 역 pp445~446 , ‘서두름의 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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