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법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법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5월 2일 토요일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법륜스님의 주례 법문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년, 이십 년, 삼십 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 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놓고는 살면서는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 살 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애기가 생기니까 또 애기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 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제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 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하객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쥐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며칠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

신랑신부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니다. 오늘 이 자리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정토회에서 만나서 부처님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 바뀌면 사흘 살고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든, 어머니가 뭐라 그러든 아버지가 뭐라 그러든, 누가 뭐라 그러든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지,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애기를 갖게 될 때 영가들도 죽을 때 초조 불안해 죽은 귀신도 있고, 편안하게 도 닦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편안한 데는 편안한 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불안하면 초조불안한 게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을 잉태를 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덥덥 하다보니까 애기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애기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이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애기가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척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 해야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애기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 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기가 조그만하다고 애기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기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애기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애기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애기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가십시요. 돈도 필요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남편은 아내를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를 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떠냐,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이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 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 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와 못살겠다 할 때, 애기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애기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하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 번 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 번 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세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이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법륜스님 주례사 (last edited 2008-06-23 01:24:45 by MinsooKim)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행복으로 가는 길 - 6 바라밀







행복으로 가는 길 - 6바라밀

깨달음 = 꿈에서 깨어 남

수행,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행, 다시 보기 - 법륜 스님

수행, 다시보기

법륜 스님 / 본지 발행인

오늘은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한문 그대로 해석을 하면 ‘행을 닦는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거울을 닦는다, 유리창을 닦는다. 방바닥을 닦는다, 라고 할 때처럼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닦는다는 말은 나쁜 것을 좋게 만든다, 더러운 것이 깨끗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닦는다 할 때는 바로 괴로운 마음,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고 미운 마음들이 결국은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변하도록 닦는다는 의미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행’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몸으로 움직이는 행이 있고, 말로 하는 행이 있고, 뜻으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신구의(身口意)라 합니다. 그러니까 업의 원인이 ‘행’입니다. ‘행’을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엔 ‘업’이 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행을 닦는다 하는 것은 업이 지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일으켜서 행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업이 지어지는데 우리가 그 업을 받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아야 하고, 업을 짓지 않으려면 바로 행을 닦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무지를 깨뜨리게 되면 바로 ‘행’이 유위의 ‘행’이 아니라 무위의 ‘행’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에 아무런 흔적이 없게 됩니다.

자,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몸으로 짓는 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업이 가장 큰 것은 살생하는 것입니다.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런 것들이 다 몸으로 짓는 행의 첫째입니다. 또 몸으로 짓는 행은 도둑질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강제로 뺏는 것도 몸으로 짓는 행입니다. 다음은 삿된 음행입니다.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강제로 추행하거나 폭행 하는 것, 부인이나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자기 아내나 남편 또는 주위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런 것들이 몸으로 짓는 행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짓는 행은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살생, 투도, 사음입니다.

두 번째, 말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말로 짓는 행’ 가운데 첫째가 거짓말 이예요. 거짓말을 한다거나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가서는 이 말하고, 저기 가서는 저 말하는 경우지요. 그렇게 싸움을 붙이고는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자기만 빠져나가는 이런 것들을 ‘양설’ 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꾸며서 말하는 것, 아양 떠는 것, 번드르르한 말을 해서 뭔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앞에서는 아양을 떨고 뒤에 가서는 욕하는 것,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 가지고 보기 좋게,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을 ‘기어’라 말합니다. 또, 악담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욕하고 폭언을 합니다. 죽일 놈, 살릴 놈,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온갖 욕을 하거나 욕뿐만 아니라 저주하거나 협박, 공갈하는 경우를 일러서 ‘악구’라 합니다. 이렇게 말로, 입으로 짓는 업을 일러서 망어, 양설, 기어, 악구라고 합니다. 이것이 입으로 짓는 업입니다.

세 번째, 뜻으로 짓는 업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 탐심입니다. 둘째가 진애,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치심 또는 우치라고 하는데 어리석고 미련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뜻으로 짓는 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신․구․의, 세 가지 업, 삼업을 짓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업을 짓고 업의 결과물,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괴로움을 ‘삼악도’라고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이것을 삼악도라고 합니다. 즉, 갖가지 극한적인 고통에 처하게 되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하고, 여러 재앙을 만나서 하는 게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아귀도’에 떨어졌다고 하고, 어리석게 사는 것, 잘 한다고 했는데 매번 결과가 나빠지는 경우, 속된 말로 ‘재수 참 없다’하는 경우를 ‘축생도’라고 하지요. 이렇게 우리들은 업을 지으면 삼악도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갖가지 괴로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누가 벌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이렇게 우리들이 몸과 말과 뜻으로 잘못된 행을 해서 그 인연으로 나타난 결과가 바로 삼악도입니다. 바로 우리들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했을 때, 제일 먼저 내는 원이 바로 ‘원아영리 삼악도’ 입니다. ‘원하옵나니 영원히 삼악도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원아속단 탐진치’ 탐․진․치의 삼독을 끊어야 합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나타난 행위가 열 가지 악, 십악입니다. 십악이란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애, 진애, 우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멈춰야만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열 가지 행을 짓지 않는 반면, 열 가지 복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살생하지 아니하고 방생하며,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보시하며, 사음하지 아니하고 그 몸을 청정히 하며, 망어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말하며, 두 가지 말하지 않고 한 가지 말을 하고, 꾸며서 말하지 아니하고, 악담하지 아니하고 자비롭게 말하고, 욕심과 탐심을 내지 아니하며, 화내고 짜증내지 아니하며, 어리석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이러한 삼악도의 고통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내 행동을 전환 시키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구․의 삼업을 짓는 우리 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행의 밑바닥, 이러한 어리석은 행이 나타나는 그 밑바닥에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행을 닦는다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수행’이라는 것은 ‘수심(修’心)’이 됩니다. 이 마음이 어리석으면 신․구․의 삼업을 짓게 되고, 이 마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되면 바로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기를 또는 자신의 삶이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도리어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어릴 때 보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좋아질 거라고, 시집가면 안 갈 때 보다 더 좋아질 거라고, 자식은 낳지 않는 것 보다 낳는 것이 좋아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계속하게 되는데, 살다보면 그것들이 도리어 화근이 되지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돈 벌려고 주식 투자했는데 그것 때문에 돈도 잃고, 부부간에 다툼도 생기고, 갖가지 괴로움도 생깁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온갖 문제가 발생한단 말예요. 노름을 해도 잃었을 땐 잃은 대로 나쁘고, 또 따도 좋은 건 잠깐이고 또 금방 문제가 생기지요.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되어서 가정불화가 생기고 친구가 등 돌려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잖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마치 쥐가 쥐약을 먹듯이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야 갖가지 재앙이 다 없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측하는 결과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욕심대로 뜻을 이루려고 하니까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러나 욕심을 버리게 되면 오히려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수행의 한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떤 보살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보살님은 자신이 다니는 절 살림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는 대보살이었어요. 초파일이면 연등 보시를 적어도 한 백장쯤은 해오시고, 방생 간다하면 차 한 대쯤 되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절에 다닌 지도 오래되고 나이도 한 쉰 살이 넘으니 절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지요. 그리고 남편도 정부 기관에서 직급이 높은 분이셨어요. 그러니 어깨에 힘주고 살아오셨어요. 저희가 맨 처음 법당을 냈을 때 이 보살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제가 처음에 법당을 냈을 때는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다방이고, 3층은 당구장이고, 4층은 조그만 비밀 댄스홀인 건물의 그 댄스홀, 2층을 월세 20만 원에 전세를 얻었습니다. 조그만 부엌과 열 평 정도의 법당, 빨간 비닐장판이 깔린 상태를 어느 하나 고치지 않고 관세음보살 그림하나 걸어 놓고 시작하였지요. 어쩌다 오는 신도들도 열 명 중 여덟 명은 삐죽이 문 열어봤다가 가버리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 대보살님이 이런 절에 나오겠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강의를 했을 때 그분이 오시게 됐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비리에 연루되어 직장에서 그만 퇴직을 당하셨어요. 아내들은 남편이 성공하면 그것이 마치 자기가 그런 냥 생각하고 남편이 잘리면 마치 자기가 잘린 양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그 대보살님이 기가 죽어 창피해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강의를 한다니까 30년 절에 다녀도 반야심경 뜻도 잘 모르니까 들으러 왔던 것이지요. 그렇게 그 보살님이 와서 공부를 해보니 반야심경에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 있던 겁니다. 재미를 붙여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집이 잘못되려 그랬는지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6개월 만에 회사가 부도났어요. 아내는 남편이 돈 못 벌어오는 것만 해도 속이 타는데, 빚쟁이가 집에 쳐들어 와서 멱살을 쥐고 돈 내 놓으라 하지, 더구나 남편은 도망가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지 그러니까 억울하고 분한 것이 터지게 되죠. 한편으로는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서 살아왔는데 또 한편으로는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살았던 겁니다. 그러니 남편이 돌아오면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남편은 아내가 직장 떨어지고 돈 떨어지니까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싸움이 커지죠.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그러니 그 보살님 입장에서는 30년을 절에 다녔는데 집이 이렇게 되면 부처님도 원망스럽죠. 그렇게 보시 많이 하고 열심히 절에 다녔는데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또 전생에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집에 시집와서 저런 남편을 만나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나, 얼마나 박복하면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기 신세타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하시라고 했더니 영험도 없는 기도는 뭣 하러하겠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반야심경 배워서 좋던 게 집안에 재앙이 오니까 불교의 지식적인 것에는 심취하면서도 기도에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께 다음과 같은 기도법을 일러드렸습니다.

‘이러한 재앙이 나 때문에 온 거다. 내가 박복해서 이런 재앙이 온 것이다. 망한 것은 남편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이다.’

그러니 이 보살님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 집에서 가만히 애 키우고 절에 다녔을 뿐이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라고 할 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바깥으로 드러난 현상은 그렇다. 하지만 당신이 박복해서 그러니 복을 지어야 된다. 첫째는 참회를 하라. 당신이 잘못해 놓고 남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있으니 당신이 참회를 해라. 두 번째는 복을 지어야 한다. 보시를 해야 한다. 지어 놓은 게 없는 박복한 사람이라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참회를 해야 하고, 두 번째는 복을 지어야 되니 보시를 해야 한다. 보시를 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 지금은 망해 가지고 끼니도 때우기 어렵다면 오늘 당신이 여기 오려고 가지고 온 차비라도 보시를 하고 걸어가라. 그렇게 해야 이 박복을 면할 수가 있다.”

그래도 30년 절에 다니며 기도한 신심이 있으니까 눈물이 나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보살님은 그걸 따라 했어요.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기도문이 내 것 같지 않겠지요. 처음에는 기도문이 머리에 들어오겠어요? 그러나 기도를 하면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게 되고 거기에 바로 이런 기도문이 너무나 자기 삶을 잘 일러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내가 왜 이렇게 인생을 바보같이 살았을까? 지난 30년 어리석게 살았구나. 그저 내가 옳다하는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살았지, 내가 남편을 이해하거나 남편을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구나. 나 같은 여자하고 사는 남편이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겠나? 이런 생각이 나면서 참회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과정에 한 6개월쯤 지나서 또 부도가 나버렸어요. 또 부도가 나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어요? ‘또 일을 저질렀구나!’ 이렇게 될 수 있는데 보살님은 기도문에 대해서 딱 감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고 내가 박복해서 남편 일이 또 안됐구나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남편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이 일이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으로 된 것이었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죄송합니다, 집안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조심하세요.” 하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게 되었어요. 빚쟁이가 빚을 받으러 집으로 오고 집에 와서 가구란 가구에 딱지를 다 붙이고, 멱살잡고, 욕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전에 같으면 같이 싸웠는데 싹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욕을 해도 다 받아들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백번 사과하니까 빚쟁이들도 상대가 겸손하고, 사는 꼴이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살고 있으니 흥분이 가라앉죠. 이렇게 되니 아이들과도 부부관계도 좋아지게 됐어요. 남편은 그전에는 한번도 아내를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했는데 아내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집이 풍비박산이 될 일 앞에서 부부가 화합이 되고, 아이들로 가정으로 돌아오니 가족화합이 됐어요. 인생이 새로운 행복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세속에 있다고 해서 수행에 조금도 불리한 게 아니고, 부도가 났거나, 가정에 불화가 생기거나, 애가 사고를 치거나, 사람이 죽는다 해서 꼭 불행한 게 아닙니다. 선혜동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발심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길거리에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는걸 보고 발심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모든 것들이 수행의 계기가 됩니다.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마저도 돌이키면 다 수행의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력은 누구나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는 누구나 다 행하면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길을 가지 않을 뿐이지요. 이렇게 되면 바로 부처님을 보기만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거리낌 하나 없는 이런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이 절로 나오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이 절로 나오게 되고, 부처님 법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이 절로 나오고, 부처님 제자 된 것이 자랑스럽게 됩니다.

자, 수행은 이런 큰 효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100일 기도한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복을 빌고 욕심을 채우는 기도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참회 기도이며 자기를 돌이켜 깨우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나도 부처님 같이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분은 맨발로 다니시고, 다 떨어진 옷을 입으시고, 걸식을 하시고, 나무 밑에서 주무시고, 가족 관계를 떠나 홀로 계셨지만은 그분은 외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과 비교해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진 건 그분보다 많지요? 신발도 그분보다 많고 옷도 많고 집도 좋고 음식도 좋고 가족도 많고, 그런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 하면 그 원인은 더 이상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잘못가진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아무리 못나서 모든 걸 다 내놓고 길거리에 맨몸뚱이로 나 앉았다 하더라도 부처님보다는 낫겠지요. 입던 옷 몇 벌이라도 있고 신발이라도 몇 개 있고 그래도 아내하고 남편 자식하고 함께 힘을 합할 사람도 몇 명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것을 분명히 아시고 정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월간정토 11월호 이달의 법문 중에서-

대화

업 Karma

불생불멸, 생사고

마음의 정체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할 뿐입니다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할 뿐입니다

몇 개의 장애물로 나의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이번에 단식기도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제일 처음에 기도를 시작할 때는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의 아픔을 내가 함께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굶는데 나는 먹고 있다면 그들의 아픔을 내가 온전하게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기도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첫 번째, 그들과 배고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것, 두 번째, 그들의 고통을 내가 함께 느낌으로 해서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기 위한 것, 세 번째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큰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큰 기적이 일어나려면 내 기도가 간절해서 천지신명이 감응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먹을 것 다 먹고 내 입을 것 다 입으면서 기도한다면 어떻게 천지신명이 감응하겠습니까.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단식을 하면서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한지 3․7일이 되었을 때 ‘아, 이제 드디어 해결의 길이 열리는구나.’ 하는데 그 옥수수 5만 톤 지원 사건이 발생하면서 주어도 안 받겠다는데 뭣 하러 주느냐며 여론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또 다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안 되는 와중에 더 노력을 했습니다. 중요한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기도 수십 번, 청와대 등 방문한 곳만도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기도한지 7․7일이 되었을 때 이대통령이 국회개원연설에서 대북인도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으며 6․15선언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북쪽에서도 민간단체의 인도적 지원 식량은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터져서 지금까지의 수고가 무색하게 도루묵이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지원은커녕 기존의 교류와 협력마저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럴 때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시 일어서느냐 하는 것은 수행자의 견고한 믿음과 정진의 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왕의 유혹을 물리친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 하지만 누구라도 덜어줄 수 있는 고통

지금 북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진도 아니고 해일도 아니고 태풍도 아니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식량만 주면 내일이라도 해결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이 세상에 식량이 없어서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식량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닫혀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가진 자는 말 합니다.

“야, 네가 궁하면 네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해야지. 왜 굶는 주제에 도리어 큰소리치느냐. 필요하면 달라 해라, 줄 테니까.”

인사를 듣고 싶은 마음은 가진 자의 오만입니다. 만약 가진 자가 이렇게 나오면, 아쉬운 쪽에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배고픈데 좀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쪽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뭐 거지냐? 안 먹고 말지. 굶어죽었으면 굶어죽었지 너한테는 달라 안 그래. 네 것은 줘도 안 받아!”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번 일으킨 자기 마음을 돌이키지 못 하고 그 마음을 움켜쥐고 계속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본인이 제기한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내가 옳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들 또한 자기가 한 게 옳다 하며 서로 주장을 하니까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데도 한국정부도 북한정부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기는 중국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정부가 올해 들어와서 식량수출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중국이 북한에 식량수출을 금지하니까 우리 JTS부터도 중국의 식량을 구입해서 지원해야 하는데 모금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식량을 지원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국수 등 비싼 식품을 구입해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이렇게 된 데 대한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내 식량 가지고 내가 안 팔겠다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말 할 뿐입니다.

일본은 비축해 둔 식량이 200만 톤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굶어죽는다고 해도 한 톨도 내 놓지 않습니다. 북한이 일본 사람들을 십여 명이나 납치해서 돌려주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런 북한에 쌀을 주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옳고 중국은 중국대로 옳고 북한은 북한대로 옳습니다. 또한 한국은 한국대로 옳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은 어떻습니까. 유가가 오르고 온갖 물가가 다 올라서 나 살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 예쁜 짓도 안하는데 거기 줄 게 어디 있나”,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의식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은 미국산 수입쇠고기 문제로 촛불시위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북한 식량난 이슈를 꺼내서 촛불민심을 분산시키려 하느냐고 말합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로 사람이 죽었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북한정부의 책임입니다. 반면 북한정부가 볼 때는 이것은 한국에 들어선 새 정부의 잘못된 통일정책의 책임이고 미 제국주의자들의 책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만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으면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들입니다. 그런데 나부터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중 누구도 이 북한동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 가해의식이 없습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불교의 인연법으로 따지면 지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수십만 명 죽인 죄를 그대로 다 받는다면 우리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다생겁래로 고통을 겪든지 아니면 지금 지진이 일어나든지 태풍이 불든지 화산이 터지든지 전염병이 돌든지 내부에 불화가 생기든지 해서 큰 재앙이 닥치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은 죄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죄 값을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습니까. 그러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이제 북한동포를 넘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북한동포가 불쌍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북한동포보다 더 불쌍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를 지어놓고도 자신이 죄를 지은 줄 모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받을 과보를 생각하면 무서워서 소름이 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은 죄를 모르는데, 죄 값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아우성이 대단하겠지요. 그러니 그들을 위하여 그 모든 과보를 제가 대신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대속(代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도 죄 지은 줄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신 저들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의 희생정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자기가 대신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아무 죄도 없다. 마음 놓고 편히 놀자. 죄는 예수님께서 다 받았으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지옥 갈 일이 없으니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며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칩니다. 이렇듯 오늘날의 기독교는 개인의 복을 비는 기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오늘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대속사상이란 것,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49일 기도 이전에는 북한에 있는 동포들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 마음이 많이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한 이쪽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더 걱정합니다. 누군가가 이 죄를 짊어져 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재앙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도를 마치려고 하다가 더 계속 기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참회할 때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다 참회한다.”고 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사실은 더 큽니다. 또 이것은 지장보살의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이기도 합니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죄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으며 아우성을 치니까 그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옥으로 가서 그들을 구제하고 자신이 그 모든 고통을 대신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단식기도는 처음에는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동체대비사상으로 출발해서 지금은 가해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는 대속사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똑같은 법문을 듣고도 그것을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듯이 우리가 기도를 할 때나 수행을 할 때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이 다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번 명상수련 한 번에 만족하지 마시고 내년에 또 와서 정진하면 더 큰 뉘우침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해에 또 와서 정진하면 더 큰 깨우침을, 더 큰 뉘우침을, 더 큰 자기 돌아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당까지 오는 수고는 법문을 듣고 갈 때 얻어가는 깨달음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오늘 당장에 죽더라도 삶에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음식을 굶는다든지 잠을 안 잔다든지 하는 이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음식을 굶어보니까, 굶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음식 굶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식을 굶는다고 마음이 더 고요해지고 더 선정에 드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억압되다보니까 오히려 신경이 더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신경질이 더 많아집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성질이 저 깊은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이게 오히려 드러나게 됩니다. 그 때 그런 자기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식은 수행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어, 이런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구나. 어, 이 정도 궁하니까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진하면서 다리가 아프니까, 가슴이 답답하니까 성질이 막 치솟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 나에게 이런 성질이 숨겨져 있구나. 알았다.’ 하고 흘려보내셔야 합니다.

지금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면 점점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

기도에는 여러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는 참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슴 속에 쌓여있는 갖가지 업장, 갖가지 상처들을 녹이는 데는 깊이 뉘우쳐 참회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행법입니다. 또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해서는 관법이야말로 좋은 수행법입니다. 늘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에 깨어 있음으로 해서, 경계에 끄달려서 짜증내고 미워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늘 적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큰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원이 크고 굳건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큰 힘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원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량 아사의 위기에 처한 북한동포를 살리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기도는 원력 기도입니다. 대승 불교는 바로 원력 보살들의 교단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갖가지 문제 속에 빠져서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를 직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큰 원을 세워서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 보살의 불교가 바로 대승 불교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이 사바세계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다 보고, 다 들어주겠다고 원력을 세웠고,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워서 원력 보살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지난 55년 동안 분단 때문에 갖가지 고통을 겪고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고통을 치유하고 다시는 이런 문제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도록, 그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루도록 우리가 원력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원을 세운 사람이라면 평생에 자기를 위해서 백만 배 절을 해야 합니다. 철이 든 다음 발원을 하고 한 30년 산다고 생각하면 만 일 정도가 되는데, 날마다 자신을 깊이 뉘우치는 108배 절을 적어도 만 일은 해야 합니다. 하루에 108 배씩 만 일을 하면 100만 배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정진으로 백만 배를 평생에 해야 합니다. 그런 원을 세워야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 통일을 위해서 어떤 원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살려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 그렇게 기도를 안 하니까 누가 대신 해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할 겁니까? 우리가 대신하자는 겁니다. 2000만 동포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2000만 배의 절을 해야 합니다. 7000만 배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운명을 바꾸려면 100만 배 절을 하고, 나라의 운명을 바꾸려면 이렇게 7000만 배는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죽음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을 두고 그들이 운명을 바꾸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 동포들이 대량아사의 위험에 놓여있습니다. 12년 전에도 이미 3백만이나 되는 그들의 가족이 굶주려 죽었는데 또 그런 참상을 겪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내 몸을 버려서라도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원력으로 정부를 움직이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의 마음까지 울리도록 기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원과 욕심의 차이가 뭘까요? 욕심은 턱도 없이 생각만 부풀려서 괴로워하는 것이고, 원은 먼 산을 쳐다보듯이, 먼 길을 갈 때 한 발 한 발 가듯이 넘어지고 엎어져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오르는 것 자체가 기쁨이듯이, 원력 보살은 목표 달성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한 배 한 배 절을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마음을 내서 기도를 하는 이 순간 이미 통일은 이루어진 겁니다.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다 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그 순간 이미 우리들 기도의 소원은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해달라고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후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해인사나 통도사 같은 절을 지을 때 참선도 해야 하고 염불도 해야 하는 스님들이 다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 일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부터 밤늦도록 불사를 해야 했지요. 그럴 때 대중을 대신해서 한 사람이 법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고 하루 종일 법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대중을 대신해서요. 그러면 대중들은 아침 예불만 끝나면 하루 종일 산에 가서 나무를 베고 다듬고, 돌을 다듬으며 절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법당에서 늘 목탁 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대중은 대패질하면서도 목도를 하면서도 늘 염불하는 기분으로 했지요. 그러므로 수행을 그만 두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그대로 수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북한의 대량아사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원력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 국민이 다 일어나 북한동포를 살리겠다고 원을 세우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일들을 또한 해야 합니다. 경제도 해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고, 여러 일을 해야 해서 바쁩니다. 그러니 우리 정토회가 그들을 대신해서 법당에 기도를 드려야지요. 24시간 동안 끊임없이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늘 기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잠 잘 때는 잠을 잘 자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일할 때는 일을 잘하는 것이 기도이고, 길을 갈 때는 길을 잘 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7000만 겨레가 다 제각기 자기가 맡은 소임을 잘 해 나가도록, 잠 잘 때는 누구나 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누구나 다 배고프지 않고 음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병든 사람은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아이들은 제 때에 배울 수 있도록, 모든 가정이 다 화목할 수 있도록,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운명을 의논할 수 있도록, 남․북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북한동포를 살릴 수 있도록,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각자 자신의 일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불국사를 지을 때 불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기쁨으로 불사에 동참했듯이, 이 나라 백성들 다 기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도울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우리가 기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민족의 관세음보살이 되어 봅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방법

자등영 법등명 - 법륜스님

세상을 살아 가는 가르침

알기 쉬운 반야심경 - 법륜 스님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한벌의 옷을 가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