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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오직 길을 안내해 줄 뿐... - 지장

길을 안내해줄 뿐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절에서 이것 저것 잡다한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매일 한 남자 분이 잠간 다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와서 잠간 법당 앞에 섰다가 합장 반배하고 돌아 가신다. 잠간 무언 가를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몇 초 동안이어서 통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두 어 달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그 남자 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매일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말도 안 하고 서로 눈 인사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내심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 온 그 남자 분은 할 말이 있다며 시간을 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얼른 티백 차 한잔을 준비했다. 찻 잔을 내어 놓자 차만 마실 뿐 말문을 열지 않으셨다. 분위기도 좀 어색해서 내가 먼저 물었다.

“저의 절 신도이십니까?”

“아니요. 신도는 아니고 그냥 가까운 곳에 사는데 시간 날 때마다 들릅니다.”

“그럼 어디 다른 절에 다니시나요?”

“아니요. 다니는 절도 없습니다. 그냥 혼자 생각나면 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거의 매일 올라오시는 것 같은데요?”

“예, 좀 답답한 일이 있어서 매일 와서 기도를 하고 갔습니다.”

“답답한 일요?”

“예. 그동안 사연이 좀 있어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재판이 잘 끝났습니까?”

“아니오. 재판에서 졌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재판을 걸었는데 결국 졌습니다.”

이 순간 특별히 해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창 밖만 바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 분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니 부처님도 야속하시지, 내가 매일 와서 기도했건만 어떻게 별 도움이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예?” 좀 항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되 물었다.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 아닙니까? 두 달 동안 매일 와서 빌었는데 하나도 소용이 없으니 젠장”

그 순간 진짜로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하고 싶어도 너무 많기도 하고 또 소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창 밖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에 ‘하루 한 번 법당 앞에 서서 인사만 하고 가서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게나’라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도 말을 하지 않자 그 남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차 잘마셨다는 짧은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그날 이 후 그 남자 분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씁쓸한 기분은 한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중아함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때 부처님이 사밧티 붓파라마 정사에 계실 때 수학자인 목갈라마가 찾아와 서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가졌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절을 찾아오려면 지나쳐 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또 제가 공부하고 있는 수학에도 단계적인 학습 방법이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에도 역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까?”

“이보게나 친구여, 내가 설하는 가르침에도 물론 거쳐야 할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네. 예를 들어 조련사가 말을 조련할 때 우선 머리를 바르게 하도록 조련하고 나서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듯이, 나도 마찬가지로 가르쳐야할 사람이 있으면 나름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단계별로 지도 한다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와 같은 지도를 받은 세존의 제자들이 모두 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이르지 못한 자도 있습니까?”

“친구여, 내 제자 중에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도 많다네”

“세존이시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분명히 깨달음의 경지가 있고 또 그 경지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세존 같은 훌륭한 지도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해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보게 친구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자네를 만나 보기 위해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세.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가는 길을 잘 가르쳐 줄 것이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라자가하까지 무사히 잘 갈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도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여, 분명히 라자가하라는 곳도 있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 길을 잘 일러준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누구는 가고 누구는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가는 길을 알려주었을 뿐이지 제대로 가고 못 가고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보게나 친구여, 마찬가지라네. 분명히 깨달음이 있고 또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길도 있고 스승도 있다네. 그러나 그 경지에 가고 못 가고는 나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일세.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일 뿐이기에” (중아함, 산수목건련경)

부처님은 중생의 복을 들어주거나 마는 그런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올바로 복 짓는 방법을 안내해주었을 뿐 복을 지어 공덕을 얻고 말고는 우리들 몫인 것이다. 그런데 간 혹 부처에게 매달리면 부처님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써서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 주지는 않을까하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적과 그 목적에 이르는 길, 그리고 그 길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면 목적지까지 편안히 데려다 달라고 떼쓰지 말고 이제 스스로 길을 떠나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급행료 주고 빨리 가게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고 가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마치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이 나대신 음식을 먹어 나의 배를 채워줄 수 없듯이 수행도 결국은 자기의 몫이다. 그리고 수행의 효과와 성취에 있어서도 자신이 올바른 방법으로 어떻게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지 지도자나 그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자신의 수행을 온전히 완성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마음이라는 영화 이야기

마음이라는 영화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갔다.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여름 방학 때를 맞이하여 유령의 집을 만들었다고 하여 가족들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재미있는 행사나 놀이거리가 그리 흔치 않았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온 몸이 쭈빗 서고 비명을 지르며 여기 저기 도망 다닌 기억이 난다. 유사한 경험이 또 있었는데 군에서 유격 훈련 받을 때 마지막 날 했던 담력 훈련이 있었다. 밤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껌껌한 숲속을 더듬 더듬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덥석 잡아 기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지금 다시 그 담력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갑자기 놀라게 하면 또 자지러지게 놀랄 것이다.

해마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극장가에는 우리의 온 몸을 싸늘하게 해주는 공포영화 한 두 편이 개봉된다. 점점 내용이나 효과 면에서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분명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무서운 대목에서는 저절로 몸이 움츠려 들게 만든다. 어렸을 적 즐겨 보던 전설의 고향과 문득 비교를 해보지만 요즘은 정말로 무서움을 느끼게 영화를 만든다.

아무리 무서운 공포 영화지만 정작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나 배우가 그 영화를 볼 때 그리 공포심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내막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떻게 분장하여 무슨 효과를 입혔는지 훤히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내심 즐길 것이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무서워해야 할 장면에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공포 영화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듯 만약 우리도 우리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꿰뚫어 알고 있다면 감정과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들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을 수 있다.

흔히 우리들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 느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우리들은 감정과 생각 등이 일어날 때 그 내용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과 장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과도 같다.

통찰(반야) 명상에서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상태나 느낌의 상태를 직시한다. 마음의 내용이나 느낌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마음이나 느낌이 어떤 모습인지 즉 어떻게 일어나 반응하고 있는 지를 보게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통찰하는 힘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는 만큼 어떤 상태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

통찰력이 계발되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느낌 등을 여러 조건과 작용의 복합적인 한 형태로 이해해서 보게 된다. 가령 화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고 하자. 일반적으로는 화가 난 상태에 빠져 버리거나 최소한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화를 잘 낸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이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내가 화를 내게 되었나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통찰의 수준으로 화를 내고 있고 상황을 본다면 현재 화나는 작용이 몸과 마음을 토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 그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여러 조건들을 토대로 또한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통찰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는 우선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어나 작용하는 상태를 보게 된다. 느낌이나 생각이 오온 즉 물질의 무더기, 감각 작용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정신적인 반응과 작용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에 불과하다는 차원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더기 들이 무수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매순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이와 같은 통찰의 차원으로 냉철하게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제작자가 영화를 보듯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대하게 된다.

내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발생하고 있는 상태를 보고 알기 때문에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에 크게 영향 받지 않게 된다.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시켜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를 유지하여 공포나 괴로운 상태를 잠시 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통찰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이해한 순간부터 이해한 만큼 마음은 가벼워 진다.

상윳따 니까야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 천신이 부처님을 뵈러 와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려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청정도론 1권 p121~122에서 재인용)

무슨 사연이 있길래

무슨 사연이 있길 래 긴 밤 울고 있는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양평 인근에 있는 산에서 이틀 동안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명상이 끝난 후 차 마시는 시간 각자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때 화제가 되었던 것이 명상 시간 내내 울어대고 있는 어떤 이름 모를 새였다. 차 마시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울고 있는데 다들 새소리에 문외한 들이라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뻐꾸기나 부엉이 소리 보다는 짧고 그렇지만 굵고 깊은 톤으로 구슬프게 울어 대는 소리였다.

아무튼 저 새가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왜 우는 지에 대한 결론은 한결 같았다. 제 짝이 될 새를 기다리느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새는 다음 날 아침 공양시간 까지 밤 새 쉬지 않고 울어댔다. 아침 공양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그 새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나 목이 아플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리 구슬프게 울어댈까?’ 새소리 때문에 각자 명상 시간 내내 의문이 절로 들었지만 그냥 이리 저리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일상 교무님이 쓴 ‘마음의 등불’이라는 책을 보면 야명조(夜鳴鳥)이야기가 나온다.

밤이면 밤마다 숨이 넘어갈 듯 애절하게 우는 새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밤에만 우는 새라하여 야명조(夜鳴鳥)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야명조가 슬피 우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집이 없기 때문에 추위에 떨려서 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의 울음이라 한다.

야명조의 울음 소리는 ‘내일 해가 뜨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을 만들어야지, 내일 해가 떠오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부터 마련해야지’하는 탄식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해가 떠오르면, 밤을 지새우며 울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먹이를 먼저 찾아 헤매이게 되고, 먹을 것을 먹을 만큼 먹으면 식곤증과 졸음이 겹쳐 잠깐 잠을 잔 뒤에 집을 만들어야지 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다보면 그만 자신도 모르게 석양이 가까울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말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집을 만들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저녁의 먹이를 찾아 헤매이기도 바빠야 하는 결과를 낳아 다시 저녁을 맞게 되고, 다시 밤을 맞아 추위에 떨면서 울어야 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한다.

가끔 외국을 여행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있다. 귀국하면 반드시 영어 학원 등록해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 그 다짐은 마음 속에 흔적 조차 없어진다. 두 달 후 독일에서 개최되는 한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정이 왔다. 다시 영어 공부라는 화두가 생각났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갔다 와서 해야겠다고 다시 미루어 본다. 아마도 야명조의 운명처럼 나에게 이생에서의 영어공부는 미루다가 끝나버릴 것 같다.

영어 공부도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우리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미루고 산다. 막상 무슨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모르고 살겠지만 후회와 탄식할 일이 남아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스님들 끼리 모여 차담을 나누는데 어떤 노스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스님이 출가 한지 얼마 안 되었을 한 창 포교에 대한 열의가 충만해 있었다. 그 스님은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천일 기도를 들어갔다. 기도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포교를 잘 하려면 큰 도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포교 도량 불사를 시작하였다. 몇 번의 천일 기도를 거쳐 시골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짓고 하여 꽤 큰 도량을 건립하게 되었다.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는데 어느 덧 그 스님의 연세는 칠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스님에게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젊은 제자에게 그 절을 물려주어 포교의 원력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그 절이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라서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았는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 운영비가 만만치 않게 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장소도 시골이라 연세 드신 불자 분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나니 절에 오는 신도도 줄어 들고 불사 중심으로 사찰을 운영하다 보니 기존의 신도분들도 지쳐서 더 이상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포교라는 큰 뜻을 가지고 시작한 불사가 결국은 건물 유지라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 마저도 여의치 않자 노쇠한 스님은 절을 매각하여 그 돈으로 작은 토굴하나 마련하여 남은 여생을 수행만 하다 죽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무언가 많은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또 그 야명조 이야기와 함께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불교용품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천도재를 잘 지내기로 유명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스님 말씀에 따르면 요즘은 귀신이 사람보다 더 많아 졌다고 한다. 귀신이 많아 져서 음기가 더 강해지고 그래서 나라도 편치 않고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한다. 내가 ‘스님같이 분이 천도재를 많이 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큰절에서도 천도재 많이 지내고 있는데’라고 물었다.

그 스님 말씀이 요즘은 귀신들이 너무 뺀질거린다고 한다. 왠만해서 재사로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부터 뺀질거려서 죽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웃으게 소리로 듣고 말았지만 만약 그 귀신들이 있다면 아마 야명조의 심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갈까? 나 자신부터 오늘 하루를 다시 생각해 본다.

견공들의 색즉시공

견공(犬公)들의 색즉시공

해가 길어진 탓인가 저녁 공양을 마치고 산책을 나가면 아직 대낮처럼 여겨진다. 직장 같다 퇴근하는 사람들과 학생들로 골목길이 좀 더 분주해져 보인다. 젊은 부부가 작고 예쁜 애완견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강아지들 하는 짓이 귀여워 내 산책길도 자연스럽게 강아지들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있다 나와서 그런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를 무슨 바쁜 일이 있는 듯 연신 뛰어다닌다. 계속해서 땅에 무슨 흥미로운 것이 있는 듯 땅에 대로 코를 벌름거리며 두 마리의 강아지는 서로 경쟁하듯 앞서 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런 와중에 전봇대나 가로수 나무가 나오면 빠트리지 않고 다가가 뒷발 하나를 들고 찍 오줌을 갈긴다. 그런 후 다시 뒷발로 흙이나 땅을 쳐내듯 오줌 눈 곳을 향해 발길 질 한다. 발을 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흙으로 자신의 흔적을 덮어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는 일어날지 모르나 별 소득 없이 발바닥만 닳아 지는 것 같다.

앞에 지나가는 몸이 흔적을 남기면 으레 뒤따라가는 녀석도 같은 곳을 먼저 냄새 맡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자취를 묻힌다. 어떤 경우는 오줌발이 빗나가 엄한 곳에 오줌이 묻었는데도 별 관심 없는 듯 그냥 습관적으로 뒷발 몇 번 튕기고 쏜살 같이 앞에 가는 놈을 추월하느라 내달린다.

명승 고적지나 해외 문화 유산 등을 가보면 한글로 써진 낙서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이 곳에 왔다 감을 기념하기 위해 나름대로 흔적을 남긴 것들이다. 어떤 곳은 바위에 새긴 경우도 있고 굵고 진한 페인트로 칠한 경우도 있다. 낙서를 쓴 사람을 우리는 모른다. 아마도 당사자 외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곳에 왔다 갔음’을 오래 도록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거나 본인의 흔적이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욕심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싶다.

개들이 나무나 전봇대에 실례를 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다. 누구의 소유라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여긴 내꺼야’라는 생각에 최대한 많이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느라 분주히 옮겨 다니고 집에 다시 들어가야 할 때가 되면 아직 해야 할 일을 많이 남겨 둔 체 떠나기 싫은 세상을 떠나는 사람처럼 깊은 아쉬움을 지닌 체 끌려 들어가다 시피 한다.

정말로 열심히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놓았건만 절대로 안심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나무와 전봇대의 주인은 수십 번 바뀐다. 그 다음 날이 되면 개들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무수한 흔적들을 발견할 것이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의 흔적을 더해 나도 이곳의 주인임을 확인 시킨다. 어떻게 보면 마치 공동 소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들은 아마도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분명 본인의 영역이 맞는데 다른 개들이 자꾸 침범을 해와 자신의 영역임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다고 서로서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영역 표시가 개들한테는 무척 중요한 일과임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중요한 일을 거르게 되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개들에게 생길 것이다. 본인들의 재산이라고 강력히 믿고 있는데 그러한 재산을 누군가에게 뺏긴다거나 또 더 넓은 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 자신은 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 할 것이다.

동네 나무와 전봇대로 표시되는 개들의 영역은 개들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기르는 개가 표시한 영역을 다른 개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그런 친절한 주인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인간들은 인간들 나름대로 그 땅에 대한 저마다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산다. 거기에 개들의 영역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개들의 눈에는 그러한 인간들의 소유 개념이 또한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개들의 세상에 인간이 침범하고 사는 건지 아니면 인간들의 영역에 개들이 침범하고 사는 건지 규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서로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믿고 산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는다.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스님, 지금처럼 수행을 하면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한 노보살님이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하시다가 물으셨다. 마음을 내어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무엇이 되는 걸까?’ ‘내가 지금 진정으로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무언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수행을 하다 보면 공부가 되든지 아니면 좋은 업이라도 쌓이겠지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막막해 지고 뭐가 뭔지 감을 잡지 못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이 옳은 건지 아니면 이렇게 해서 무엇하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장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시작은 했는데 금방 포기하기는 그렇고, 공부는 해야 될 것 같고 해서 그냥 관념적으로 수행에 임하기도 한다.

“글쎄요, 무엇이 된다기 보다는 그냥 자신을 좀 더 알게 되겠지요”

“그러면 만약 내가 나를 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보살님은 처음 무엇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셨나요?”

“잘 살아보고 싶어서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더 잘 안다면 그만큼 잘 살아가겠지요”

“나를 잘 아는 것하고 잘 사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노보살님은 벼르고 오신 것 마냥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셨다.

“보살님, 제가 한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 촛불이 켜져 있다고 합시다. 촛불이 켜져 있으려면 최소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아마 성냥, 초, 심지, 공기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예, 맞습니다. 촛불이 켜져 있으려면 최소한 성냥이나, 초, 심지, 공기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더 자세히 언급하면 초를 만드는 파라핀이나 초를 만드는 공장, 사람 등도 필요하지만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이 네 가지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만약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있지 않으면 촛불이 켜져 있을 수 있을까요?”

“없어요. 전부 다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촛불이 켜져 있기 전에 그 불꽃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요, 오긴 어디서 와요. 성냥에서 만들어져서 심지에 옮겨 진 것이지요.”

“그럼 이 촛불을 입으로 불어 꺼트리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없어지지요”

“촛불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켜져 있으면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촛불은 켜져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즉 공기와 초와 심지가 있을 때만 촛불은 존재하는 것이지 그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촛불은 어떤 조건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절대로 자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변하면 사라집니다. 촛불은 그냥 켜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초를 태우며 존재합니다. 매 순간 연소되는 초가 있기에 촛불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촛불은 매 순간 항상 새로운 촛불입니다.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 지고 있지요. 이것을 불교 용어로 무상(無常)이라 합니다. 또 촛불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체가 없다해서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고 합니다. 대상과 그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그리고 대상과 감각기관이 만나 생겨나는 식(識), 이 세 가지를 조건으로 ‘나’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 현상이 만들어져 지속된다고 합니다. ‘나’는 촛불처럼 그 실체가 따로 있어서 어디서 왔거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조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조건들이 어우러져 접촉(觸)하게 되면 식(識)이 발생하고 이때 느낌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이 느낌의 장난이 지금의 ‘나’가 된다고 합니다.

말이 좀 길어 졌습니다. 즉 명상 수행을 통해 나를 안다는 것은 지금 ‘나’라고 여기는 것이 이렇게 조건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느낌과 감정, 생각 등도 마찬가지로 여러 조건을 통해 단지 발생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조건과 원인이라는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평소 자신을 대하면 불만족스러운 여러 느낌이나 상태 또한 조건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고 크게 영향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만큼 마음은 가벼워 지겠지요. 나를 휘몰아 치는 여러 욕망과 감정 또한 조건을 통해 만들어 짐을 알면 그 순간 더 효과적으로 절제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잘 알며 절제를 잘 하고 산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

“명상을 한다고 바로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숫타니 파타>에 나오는 한 구절 소개시켜드릴게요.”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위대하신 스승님께 여쭙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보아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에 듭니까?”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 어떠한 갈애가 안에 있더라도 확실히 자각하여 그것들을 제거하도록 공부하십시오. 안으로 뿐만 아니라 밖으로 어떠한 현상이든 잘 알 수 있더라도,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사람에게 그것은 소멸이라 불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라고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받더라도, 자기를 내세우는 허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안으로 평안해야 합니다. 밖에서 평안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안으로 평안하게 된 사람에게는 취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버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바다 한 가운데에서 파도가 일지 않고 멈추듯, 멈추어서 결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든 파도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숫타니 파타>, 전재성 역 pp445~446 , ‘서두름의 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