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안내해줄 뿐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절에서 이것 저것 잡다한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매일 한 남자 분이 잠간 다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와서 잠간 법당 앞에 섰다가 합장 반배하고 돌아 가신다. 잠간 무언 가를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몇 초 동안이어서 통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두 어 달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그 남자 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매일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말도 안 하고 서로 눈 인사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내심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 온 그 남자 분은 할 말이 있다며 시간을 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얼른 티백 차 한잔을 준비했다. 찻 잔을 내어 놓자 차만 마실 뿐 말문을 열지 않으셨다. 분위기도 좀 어색해서 내가 먼저 물었다.
“저의 절 신도이십니까?”
“아니요. 신도는 아니고 그냥 가까운 곳에 사는데 시간 날 때마다 들릅니다.”
“그럼 어디 다른 절에 다니시나요?”
“아니요. 다니는 절도 없습니다. 그냥 혼자 생각나면 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거의 매일 올라오시는 것 같은데요?”
“예, 좀 답답한 일이 있어서 매일 와서 기도를 하고 갔습니다.”
“답답한 일요?”
“예. 그동안 사연이 좀 있어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재판이 잘 끝났습니까?”
“아니오. 재판에서 졌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재판을 걸었는데 결국 졌습니다.”
이 순간 특별히 해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창 밖만 바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 분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니 부처님도 야속하시지, 내가 매일 와서 기도했건만 어떻게 별 도움이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예?” 좀 항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되 물었다.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 아닙니까? 두 달 동안 매일 와서 빌었는데 하나도 소용이 없으니 젠장”
그 순간 진짜로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하고 싶어도 너무 많기도 하고 또 소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창 밖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에 ‘하루 한 번 법당 앞에 서서 인사만 하고 가서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게나’라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도 말을 하지 않자 그 남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차 잘마셨다는 짧은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그날 이 후 그 남자 분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씁쓸한 기분은 한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중아함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때 부처님이 사밧티 붓파라마 정사에 계실 때 수학자인 목갈라마가 찾아와 서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가졌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절을 찾아오려면 지나쳐 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또 제가 공부하고 있는 수학에도 단계적인 학습 방법이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에도 역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까?”
“이보게나 친구여, 내가 설하는 가르침에도 물론 거쳐야 할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네. 예를 들어 조련사가 말을 조련할 때 우선 머리를 바르게 하도록 조련하고 나서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듯이, 나도 마찬가지로 가르쳐야할 사람이 있으면 나름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단계별로 지도 한다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와 같은 지도를 받은 세존의 제자들이 모두 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이르지 못한 자도 있습니까?”
“친구여, 내 제자 중에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도 많다네”
“세존이시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분명히 깨달음의 경지가 있고 또 그 경지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세존 같은 훌륭한 지도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해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보게 친구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자네를 만나 보기 위해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세.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가는 길을 잘 가르쳐 줄 것이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라자가하까지 무사히 잘 갈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도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여, 분명히 라자가하라는 곳도 있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 길을 잘 일러준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누구는 가고 누구는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가는 길을 알려주었을 뿐이지 제대로 가고 못 가고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보게나 친구여, 마찬가지라네. 분명히 깨달음이 있고 또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길도 있고 스승도 있다네. 그러나 그 경지에 가고 못 가고는 나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일세.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일 뿐이기에” (중아함, 산수목건련경)
부처님은 중생의 복을 들어주거나 마는 그런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올바로 복 짓는 방법을 안내해주었을 뿐 복을 지어 공덕을 얻고 말고는 우리들 몫인 것이다. 그런데 간 혹 부처에게 매달리면 부처님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써서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 주지는 않을까하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적과 그 목적에 이르는 길, 그리고 그 길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면 목적지까지 편안히 데려다 달라고 떼쓰지 말고 이제 스스로 길을 떠나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급행료 주고 빨리 가게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고 가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마치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이 나대신 음식을 먹어 나의 배를 채워줄 수 없듯이 수행도 결국은 자기의 몫이다. 그리고 수행의 효과와 성취에 있어서도 자신이 올바른 방법으로 어떻게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지 지도자나 그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자신의 수행을 온전히 완성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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