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오직 길을 안내해 줄 뿐... - 지장

길을 안내해줄 뿐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절에서 이것 저것 잡다한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매일 한 남자 분이 잠간 다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와서 잠간 법당 앞에 섰다가 합장 반배하고 돌아 가신다. 잠간 무언 가를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몇 초 동안이어서 통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두 어 달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그 남자 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매일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말도 안 하고 서로 눈 인사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내심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 온 그 남자 분은 할 말이 있다며 시간을 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얼른 티백 차 한잔을 준비했다. 찻 잔을 내어 놓자 차만 마실 뿐 말문을 열지 않으셨다. 분위기도 좀 어색해서 내가 먼저 물었다.

“저의 절 신도이십니까?”

“아니요. 신도는 아니고 그냥 가까운 곳에 사는데 시간 날 때마다 들릅니다.”

“그럼 어디 다른 절에 다니시나요?”

“아니요. 다니는 절도 없습니다. 그냥 혼자 생각나면 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거의 매일 올라오시는 것 같은데요?”

“예, 좀 답답한 일이 있어서 매일 와서 기도를 하고 갔습니다.”

“답답한 일요?”

“예. 그동안 사연이 좀 있어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재판이 잘 끝났습니까?”

“아니오. 재판에서 졌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재판을 걸었는데 결국 졌습니다.”

이 순간 특별히 해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창 밖만 바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 분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니 부처님도 야속하시지, 내가 매일 와서 기도했건만 어떻게 별 도움이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예?” 좀 항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되 물었다.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 아닙니까? 두 달 동안 매일 와서 빌었는데 하나도 소용이 없으니 젠장”

그 순간 진짜로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하고 싶어도 너무 많기도 하고 또 소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창 밖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에 ‘하루 한 번 법당 앞에 서서 인사만 하고 가서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게나’라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도 말을 하지 않자 그 남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차 잘마셨다는 짧은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그날 이 후 그 남자 분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씁쓸한 기분은 한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중아함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때 부처님이 사밧티 붓파라마 정사에 계실 때 수학자인 목갈라마가 찾아와 서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가졌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절을 찾아오려면 지나쳐 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또 제가 공부하고 있는 수학에도 단계적인 학습 방법이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에도 역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까?”

“이보게나 친구여, 내가 설하는 가르침에도 물론 거쳐야 할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네. 예를 들어 조련사가 말을 조련할 때 우선 머리를 바르게 하도록 조련하고 나서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듯이, 나도 마찬가지로 가르쳐야할 사람이 있으면 나름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단계별로 지도 한다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와 같은 지도를 받은 세존의 제자들이 모두 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이르지 못한 자도 있습니까?”

“친구여, 내 제자 중에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도 많다네”

“세존이시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분명히 깨달음의 경지가 있고 또 그 경지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세존 같은 훌륭한 지도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해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보게 친구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자네를 만나 보기 위해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세.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가는 길을 잘 가르쳐 줄 것이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라자가하까지 무사히 잘 갈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도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여, 분명히 라자가하라는 곳도 있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 길을 잘 일러준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누구는 가고 누구는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가는 길을 알려주었을 뿐이지 제대로 가고 못 가고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보게나 친구여, 마찬가지라네. 분명히 깨달음이 있고 또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길도 있고 스승도 있다네. 그러나 그 경지에 가고 못 가고는 나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일세.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일 뿐이기에” (중아함, 산수목건련경)

부처님은 중생의 복을 들어주거나 마는 그런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올바로 복 짓는 방법을 안내해주었을 뿐 복을 지어 공덕을 얻고 말고는 우리들 몫인 것이다. 그런데 간 혹 부처에게 매달리면 부처님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써서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 주지는 않을까하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적과 그 목적에 이르는 길, 그리고 그 길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면 목적지까지 편안히 데려다 달라고 떼쓰지 말고 이제 스스로 길을 떠나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급행료 주고 빨리 가게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고 가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마치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이 나대신 음식을 먹어 나의 배를 채워줄 수 없듯이 수행도 결국은 자기의 몫이다. 그리고 수행의 효과와 성취에 있어서도 자신이 올바른 방법으로 어떻게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지 지도자나 그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자신의 수행을 온전히 완성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행복으로 가는 길 - 6 바라밀







행복으로 가는 길 - 6바라밀

깨달음 = 꿈에서 깨어 남

수행,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행, 다시 보기 - 법륜 스님

수행, 다시보기

법륜 스님 / 본지 발행인

오늘은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한문 그대로 해석을 하면 ‘행을 닦는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거울을 닦는다, 유리창을 닦는다. 방바닥을 닦는다, 라고 할 때처럼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닦는다는 말은 나쁜 것을 좋게 만든다, 더러운 것이 깨끗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닦는다 할 때는 바로 괴로운 마음,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고 미운 마음들이 결국은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변하도록 닦는다는 의미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행’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몸으로 움직이는 행이 있고, 말로 하는 행이 있고, 뜻으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신구의(身口意)라 합니다. 그러니까 업의 원인이 ‘행’입니다. ‘행’을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엔 ‘업’이 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행을 닦는다 하는 것은 업이 지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일으켜서 행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업이 지어지는데 우리가 그 업을 받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아야 하고, 업을 짓지 않으려면 바로 행을 닦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무지를 깨뜨리게 되면 바로 ‘행’이 유위의 ‘행’이 아니라 무위의 ‘행’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에 아무런 흔적이 없게 됩니다.

자,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몸으로 짓는 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업이 가장 큰 것은 살생하는 것입니다.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런 것들이 다 몸으로 짓는 행의 첫째입니다. 또 몸으로 짓는 행은 도둑질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강제로 뺏는 것도 몸으로 짓는 행입니다. 다음은 삿된 음행입니다.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강제로 추행하거나 폭행 하는 것, 부인이나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자기 아내나 남편 또는 주위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런 것들이 몸으로 짓는 행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짓는 행은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살생, 투도, 사음입니다.

두 번째, 말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말로 짓는 행’ 가운데 첫째가 거짓말 이예요. 거짓말을 한다거나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가서는 이 말하고, 저기 가서는 저 말하는 경우지요. 그렇게 싸움을 붙이고는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자기만 빠져나가는 이런 것들을 ‘양설’ 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꾸며서 말하는 것, 아양 떠는 것, 번드르르한 말을 해서 뭔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앞에서는 아양을 떨고 뒤에 가서는 욕하는 것,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 가지고 보기 좋게,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을 ‘기어’라 말합니다. 또, 악담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욕하고 폭언을 합니다. 죽일 놈, 살릴 놈,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온갖 욕을 하거나 욕뿐만 아니라 저주하거나 협박, 공갈하는 경우를 일러서 ‘악구’라 합니다. 이렇게 말로, 입으로 짓는 업을 일러서 망어, 양설, 기어, 악구라고 합니다. 이것이 입으로 짓는 업입니다.

세 번째, 뜻으로 짓는 업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 탐심입니다. 둘째가 진애,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치심 또는 우치라고 하는데 어리석고 미련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뜻으로 짓는 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신․구․의, 세 가지 업, 삼업을 짓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업을 짓고 업의 결과물,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괴로움을 ‘삼악도’라고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이것을 삼악도라고 합니다. 즉, 갖가지 극한적인 고통에 처하게 되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하고, 여러 재앙을 만나서 하는 게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아귀도’에 떨어졌다고 하고, 어리석게 사는 것, 잘 한다고 했는데 매번 결과가 나빠지는 경우, 속된 말로 ‘재수 참 없다’하는 경우를 ‘축생도’라고 하지요. 이렇게 우리들은 업을 지으면 삼악도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갖가지 괴로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누가 벌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이렇게 우리들이 몸과 말과 뜻으로 잘못된 행을 해서 그 인연으로 나타난 결과가 바로 삼악도입니다. 바로 우리들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했을 때, 제일 먼저 내는 원이 바로 ‘원아영리 삼악도’ 입니다. ‘원하옵나니 영원히 삼악도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원아속단 탐진치’ 탐․진․치의 삼독을 끊어야 합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나타난 행위가 열 가지 악, 십악입니다. 십악이란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애, 진애, 우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멈춰야만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열 가지 행을 짓지 않는 반면, 열 가지 복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살생하지 아니하고 방생하며,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보시하며, 사음하지 아니하고 그 몸을 청정히 하며, 망어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말하며, 두 가지 말하지 않고 한 가지 말을 하고, 꾸며서 말하지 아니하고, 악담하지 아니하고 자비롭게 말하고, 욕심과 탐심을 내지 아니하며, 화내고 짜증내지 아니하며, 어리석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이러한 삼악도의 고통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내 행동을 전환 시키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구․의 삼업을 짓는 우리 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행의 밑바닥, 이러한 어리석은 행이 나타나는 그 밑바닥에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행을 닦는다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수행’이라는 것은 ‘수심(修’心)’이 됩니다. 이 마음이 어리석으면 신․구․의 삼업을 짓게 되고, 이 마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되면 바로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기를 또는 자신의 삶이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도리어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어릴 때 보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좋아질 거라고, 시집가면 안 갈 때 보다 더 좋아질 거라고, 자식은 낳지 않는 것 보다 낳는 것이 좋아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계속하게 되는데, 살다보면 그것들이 도리어 화근이 되지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돈 벌려고 주식 투자했는데 그것 때문에 돈도 잃고, 부부간에 다툼도 생기고, 갖가지 괴로움도 생깁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온갖 문제가 발생한단 말예요. 노름을 해도 잃었을 땐 잃은 대로 나쁘고, 또 따도 좋은 건 잠깐이고 또 금방 문제가 생기지요.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되어서 가정불화가 생기고 친구가 등 돌려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잖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마치 쥐가 쥐약을 먹듯이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야 갖가지 재앙이 다 없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측하는 결과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욕심대로 뜻을 이루려고 하니까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러나 욕심을 버리게 되면 오히려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수행의 한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떤 보살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보살님은 자신이 다니는 절 살림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는 대보살이었어요. 초파일이면 연등 보시를 적어도 한 백장쯤은 해오시고, 방생 간다하면 차 한 대쯤 되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절에 다닌 지도 오래되고 나이도 한 쉰 살이 넘으니 절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지요. 그리고 남편도 정부 기관에서 직급이 높은 분이셨어요. 그러니 어깨에 힘주고 살아오셨어요. 저희가 맨 처음 법당을 냈을 때 이 보살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제가 처음에 법당을 냈을 때는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다방이고, 3층은 당구장이고, 4층은 조그만 비밀 댄스홀인 건물의 그 댄스홀, 2층을 월세 20만 원에 전세를 얻었습니다. 조그만 부엌과 열 평 정도의 법당, 빨간 비닐장판이 깔린 상태를 어느 하나 고치지 않고 관세음보살 그림하나 걸어 놓고 시작하였지요. 어쩌다 오는 신도들도 열 명 중 여덟 명은 삐죽이 문 열어봤다가 가버리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 대보살님이 이런 절에 나오겠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강의를 했을 때 그분이 오시게 됐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비리에 연루되어 직장에서 그만 퇴직을 당하셨어요. 아내들은 남편이 성공하면 그것이 마치 자기가 그런 냥 생각하고 남편이 잘리면 마치 자기가 잘린 양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그 대보살님이 기가 죽어 창피해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강의를 한다니까 30년 절에 다녀도 반야심경 뜻도 잘 모르니까 들으러 왔던 것이지요. 그렇게 그 보살님이 와서 공부를 해보니 반야심경에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 있던 겁니다. 재미를 붙여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집이 잘못되려 그랬는지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6개월 만에 회사가 부도났어요. 아내는 남편이 돈 못 벌어오는 것만 해도 속이 타는데, 빚쟁이가 집에 쳐들어 와서 멱살을 쥐고 돈 내 놓으라 하지, 더구나 남편은 도망가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지 그러니까 억울하고 분한 것이 터지게 되죠. 한편으로는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서 살아왔는데 또 한편으로는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살았던 겁니다. 그러니 남편이 돌아오면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남편은 아내가 직장 떨어지고 돈 떨어지니까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싸움이 커지죠.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그러니 그 보살님 입장에서는 30년을 절에 다녔는데 집이 이렇게 되면 부처님도 원망스럽죠. 그렇게 보시 많이 하고 열심히 절에 다녔는데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또 전생에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집에 시집와서 저런 남편을 만나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나, 얼마나 박복하면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기 신세타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하시라고 했더니 영험도 없는 기도는 뭣 하러하겠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반야심경 배워서 좋던 게 집안에 재앙이 오니까 불교의 지식적인 것에는 심취하면서도 기도에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께 다음과 같은 기도법을 일러드렸습니다.

‘이러한 재앙이 나 때문에 온 거다. 내가 박복해서 이런 재앙이 온 것이다. 망한 것은 남편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이다.’

그러니 이 보살님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 집에서 가만히 애 키우고 절에 다녔을 뿐이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라고 할 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바깥으로 드러난 현상은 그렇다. 하지만 당신이 박복해서 그러니 복을 지어야 된다. 첫째는 참회를 하라. 당신이 잘못해 놓고 남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있으니 당신이 참회를 해라. 두 번째는 복을 지어야 한다. 보시를 해야 한다. 지어 놓은 게 없는 박복한 사람이라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참회를 해야 하고, 두 번째는 복을 지어야 되니 보시를 해야 한다. 보시를 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 지금은 망해 가지고 끼니도 때우기 어렵다면 오늘 당신이 여기 오려고 가지고 온 차비라도 보시를 하고 걸어가라. 그렇게 해야 이 박복을 면할 수가 있다.”

그래도 30년 절에 다니며 기도한 신심이 있으니까 눈물이 나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보살님은 그걸 따라 했어요.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기도문이 내 것 같지 않겠지요. 처음에는 기도문이 머리에 들어오겠어요? 그러나 기도를 하면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게 되고 거기에 바로 이런 기도문이 너무나 자기 삶을 잘 일러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내가 왜 이렇게 인생을 바보같이 살았을까? 지난 30년 어리석게 살았구나. 그저 내가 옳다하는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살았지, 내가 남편을 이해하거나 남편을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구나. 나 같은 여자하고 사는 남편이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겠나? 이런 생각이 나면서 참회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과정에 한 6개월쯤 지나서 또 부도가 나버렸어요. 또 부도가 나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어요? ‘또 일을 저질렀구나!’ 이렇게 될 수 있는데 보살님은 기도문에 대해서 딱 감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고 내가 박복해서 남편 일이 또 안됐구나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남편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이 일이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으로 된 것이었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죄송합니다, 집안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조심하세요.” 하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게 되었어요. 빚쟁이가 빚을 받으러 집으로 오고 집에 와서 가구란 가구에 딱지를 다 붙이고, 멱살잡고, 욕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전에 같으면 같이 싸웠는데 싹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욕을 해도 다 받아들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백번 사과하니까 빚쟁이들도 상대가 겸손하고, 사는 꼴이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살고 있으니 흥분이 가라앉죠. 이렇게 되니 아이들과도 부부관계도 좋아지게 됐어요. 남편은 그전에는 한번도 아내를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했는데 아내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집이 풍비박산이 될 일 앞에서 부부가 화합이 되고, 아이들로 가정으로 돌아오니 가족화합이 됐어요. 인생이 새로운 행복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세속에 있다고 해서 수행에 조금도 불리한 게 아니고, 부도가 났거나, 가정에 불화가 생기거나, 애가 사고를 치거나, 사람이 죽는다 해서 꼭 불행한 게 아닙니다. 선혜동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발심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길거리에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는걸 보고 발심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모든 것들이 수행의 계기가 됩니다.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마저도 돌이키면 다 수행의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력은 누구나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는 누구나 다 행하면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길을 가지 않을 뿐이지요. 이렇게 되면 바로 부처님을 보기만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거리낌 하나 없는 이런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이 절로 나오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이 절로 나오게 되고, 부처님 법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이 절로 나오고, 부처님 제자 된 것이 자랑스럽게 됩니다.

자, 수행은 이런 큰 효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100일 기도한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복을 빌고 욕심을 채우는 기도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참회 기도이며 자기를 돌이켜 깨우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나도 부처님 같이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분은 맨발로 다니시고, 다 떨어진 옷을 입으시고, 걸식을 하시고, 나무 밑에서 주무시고, 가족 관계를 떠나 홀로 계셨지만은 그분은 외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과 비교해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진 건 그분보다 많지요? 신발도 그분보다 많고 옷도 많고 집도 좋고 음식도 좋고 가족도 많고, 그런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 하면 그 원인은 더 이상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잘못가진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아무리 못나서 모든 걸 다 내놓고 길거리에 맨몸뚱이로 나 앉았다 하더라도 부처님보다는 낫겠지요. 입던 옷 몇 벌이라도 있고 신발이라도 몇 개 있고 그래도 아내하고 남편 자식하고 함께 힘을 합할 사람도 몇 명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것을 분명히 아시고 정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월간정토 11월호 이달의 법문 중에서-

The Life of the Buddha - BBC

리차드 기어, 현각을 만나다

대화

업 Karma

불생불멸, 생사고

마음의 정체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할 뿐입니다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할 뿐입니다

몇 개의 장애물로 나의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이번에 단식기도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제일 처음에 기도를 시작할 때는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의 아픔을 내가 함께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굶는데 나는 먹고 있다면 그들의 아픔을 내가 온전하게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기도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첫 번째, 그들과 배고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것, 두 번째, 그들의 고통을 내가 함께 느낌으로 해서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기 위한 것, 세 번째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큰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큰 기적이 일어나려면 내 기도가 간절해서 천지신명이 감응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먹을 것 다 먹고 내 입을 것 다 입으면서 기도한다면 어떻게 천지신명이 감응하겠습니까.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단식을 하면서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한지 3․7일이 되었을 때 ‘아, 이제 드디어 해결의 길이 열리는구나.’ 하는데 그 옥수수 5만 톤 지원 사건이 발생하면서 주어도 안 받겠다는데 뭣 하러 주느냐며 여론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또 다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안 되는 와중에 더 노력을 했습니다. 중요한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기도 수십 번, 청와대 등 방문한 곳만도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기도한지 7․7일이 되었을 때 이대통령이 국회개원연설에서 대북인도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으며 6․15선언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북쪽에서도 민간단체의 인도적 지원 식량은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터져서 지금까지의 수고가 무색하게 도루묵이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지원은커녕 기존의 교류와 협력마저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럴 때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시 일어서느냐 하는 것은 수행자의 견고한 믿음과 정진의 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왕의 유혹을 물리친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 하지만 누구라도 덜어줄 수 있는 고통

지금 북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진도 아니고 해일도 아니고 태풍도 아니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식량만 주면 내일이라도 해결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이 세상에 식량이 없어서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식량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닫혀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가진 자는 말 합니다.

“야, 네가 궁하면 네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해야지. 왜 굶는 주제에 도리어 큰소리치느냐. 필요하면 달라 해라, 줄 테니까.”

인사를 듣고 싶은 마음은 가진 자의 오만입니다. 만약 가진 자가 이렇게 나오면, 아쉬운 쪽에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배고픈데 좀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쪽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뭐 거지냐? 안 먹고 말지. 굶어죽었으면 굶어죽었지 너한테는 달라 안 그래. 네 것은 줘도 안 받아!”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번 일으킨 자기 마음을 돌이키지 못 하고 그 마음을 움켜쥐고 계속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본인이 제기한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내가 옳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들 또한 자기가 한 게 옳다 하며 서로 주장을 하니까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데도 한국정부도 북한정부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기는 중국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정부가 올해 들어와서 식량수출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중국이 북한에 식량수출을 금지하니까 우리 JTS부터도 중국의 식량을 구입해서 지원해야 하는데 모금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식량을 지원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국수 등 비싼 식품을 구입해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이렇게 된 데 대한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내 식량 가지고 내가 안 팔겠다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말 할 뿐입니다.

일본은 비축해 둔 식량이 200만 톤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굶어죽는다고 해도 한 톨도 내 놓지 않습니다. 북한이 일본 사람들을 십여 명이나 납치해서 돌려주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런 북한에 쌀을 주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옳고 중국은 중국대로 옳고 북한은 북한대로 옳습니다. 또한 한국은 한국대로 옳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은 어떻습니까. 유가가 오르고 온갖 물가가 다 올라서 나 살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 예쁜 짓도 안하는데 거기 줄 게 어디 있나”,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의식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은 미국산 수입쇠고기 문제로 촛불시위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북한 식량난 이슈를 꺼내서 촛불민심을 분산시키려 하느냐고 말합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로 사람이 죽었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북한정부의 책임입니다. 반면 북한정부가 볼 때는 이것은 한국에 들어선 새 정부의 잘못된 통일정책의 책임이고 미 제국주의자들의 책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만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으면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들입니다. 그런데 나부터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중 누구도 이 북한동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 가해의식이 없습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불교의 인연법으로 따지면 지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수십만 명 죽인 죄를 그대로 다 받는다면 우리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다생겁래로 고통을 겪든지 아니면 지금 지진이 일어나든지 태풍이 불든지 화산이 터지든지 전염병이 돌든지 내부에 불화가 생기든지 해서 큰 재앙이 닥치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은 죄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죄 값을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습니까. 그러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이제 북한동포를 넘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북한동포가 불쌍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북한동포보다 더 불쌍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를 지어놓고도 자신이 죄를 지은 줄 모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받을 과보를 생각하면 무서워서 소름이 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은 죄를 모르는데, 죄 값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아우성이 대단하겠지요. 그러니 그들을 위하여 그 모든 과보를 제가 대신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대속(代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도 죄 지은 줄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신 저들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의 희생정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자기가 대신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아무 죄도 없다. 마음 놓고 편히 놀자. 죄는 예수님께서 다 받았으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지옥 갈 일이 없으니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며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칩니다. 이렇듯 오늘날의 기독교는 개인의 복을 비는 기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오늘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대속사상이란 것,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49일 기도 이전에는 북한에 있는 동포들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 마음이 많이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한 이쪽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더 걱정합니다. 누군가가 이 죄를 짊어져 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재앙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도를 마치려고 하다가 더 계속 기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참회할 때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다 참회한다.”고 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사실은 더 큽니다. 또 이것은 지장보살의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이기도 합니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죄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으며 아우성을 치니까 그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옥으로 가서 그들을 구제하고 자신이 그 모든 고통을 대신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단식기도는 처음에는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동체대비사상으로 출발해서 지금은 가해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는 대속사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똑같은 법문을 듣고도 그것을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듯이 우리가 기도를 할 때나 수행을 할 때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이 다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번 명상수련 한 번에 만족하지 마시고 내년에 또 와서 정진하면 더 큰 뉘우침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해에 또 와서 정진하면 더 큰 깨우침을, 더 큰 뉘우침을, 더 큰 자기 돌아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당까지 오는 수고는 법문을 듣고 갈 때 얻어가는 깨달음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오늘 당장에 죽더라도 삶에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음식을 굶는다든지 잠을 안 잔다든지 하는 이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음식을 굶어보니까, 굶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음식 굶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식을 굶는다고 마음이 더 고요해지고 더 선정에 드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억압되다보니까 오히려 신경이 더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신경질이 더 많아집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성질이 저 깊은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이게 오히려 드러나게 됩니다. 그 때 그런 자기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식은 수행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어, 이런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구나. 어, 이 정도 궁하니까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진하면서 다리가 아프니까, 가슴이 답답하니까 성질이 막 치솟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 나에게 이런 성질이 숨겨져 있구나. 알았다.’ 하고 흘려보내셔야 합니다.

지금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면 점점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

기도에는 여러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는 참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슴 속에 쌓여있는 갖가지 업장, 갖가지 상처들을 녹이는 데는 깊이 뉘우쳐 참회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행법입니다. 또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해서는 관법이야말로 좋은 수행법입니다. 늘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에 깨어 있음으로 해서, 경계에 끄달려서 짜증내고 미워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늘 적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큰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원이 크고 굳건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큰 힘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원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량 아사의 위기에 처한 북한동포를 살리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기도는 원력 기도입니다. 대승 불교는 바로 원력 보살들의 교단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갖가지 문제 속에 빠져서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를 직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큰 원을 세워서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 보살의 불교가 바로 대승 불교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이 사바세계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다 보고, 다 들어주겠다고 원력을 세웠고,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워서 원력 보살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지난 55년 동안 분단 때문에 갖가지 고통을 겪고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고통을 치유하고 다시는 이런 문제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도록, 그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루도록 우리가 원력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원을 세운 사람이라면 평생에 자기를 위해서 백만 배 절을 해야 합니다. 철이 든 다음 발원을 하고 한 30년 산다고 생각하면 만 일 정도가 되는데, 날마다 자신을 깊이 뉘우치는 108배 절을 적어도 만 일은 해야 합니다. 하루에 108 배씩 만 일을 하면 100만 배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정진으로 백만 배를 평생에 해야 합니다. 그런 원을 세워야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 통일을 위해서 어떤 원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살려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 그렇게 기도를 안 하니까 누가 대신 해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할 겁니까? 우리가 대신하자는 겁니다. 2000만 동포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2000만 배의 절을 해야 합니다. 7000만 배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운명을 바꾸려면 100만 배 절을 하고, 나라의 운명을 바꾸려면 이렇게 7000만 배는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죽음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을 두고 그들이 운명을 바꾸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 동포들이 대량아사의 위험에 놓여있습니다. 12년 전에도 이미 3백만이나 되는 그들의 가족이 굶주려 죽었는데 또 그런 참상을 겪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내 몸을 버려서라도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원력으로 정부를 움직이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의 마음까지 울리도록 기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원과 욕심의 차이가 뭘까요? 욕심은 턱도 없이 생각만 부풀려서 괴로워하는 것이고, 원은 먼 산을 쳐다보듯이, 먼 길을 갈 때 한 발 한 발 가듯이 넘어지고 엎어져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오르는 것 자체가 기쁨이듯이, 원력 보살은 목표 달성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한 배 한 배 절을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마음을 내서 기도를 하는 이 순간 이미 통일은 이루어진 겁니다.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다 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그 순간 이미 우리들 기도의 소원은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해달라고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후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해인사나 통도사 같은 절을 지을 때 참선도 해야 하고 염불도 해야 하는 스님들이 다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 일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부터 밤늦도록 불사를 해야 했지요. 그럴 때 대중을 대신해서 한 사람이 법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고 하루 종일 법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대중을 대신해서요. 그러면 대중들은 아침 예불만 끝나면 하루 종일 산에 가서 나무를 베고 다듬고, 돌을 다듬으며 절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법당에서 늘 목탁 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대중은 대패질하면서도 목도를 하면서도 늘 염불하는 기분으로 했지요. 그러므로 수행을 그만 두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그대로 수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북한의 대량아사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원력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 국민이 다 일어나 북한동포를 살리겠다고 원을 세우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일들을 또한 해야 합니다. 경제도 해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고, 여러 일을 해야 해서 바쁩니다. 그러니 우리 정토회가 그들을 대신해서 법당에 기도를 드려야지요. 24시간 동안 끊임없이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늘 기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잠 잘 때는 잠을 잘 자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일할 때는 일을 잘하는 것이 기도이고, 길을 갈 때는 길을 잘 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7000만 겨레가 다 제각기 자기가 맡은 소임을 잘 해 나가도록, 잠 잘 때는 누구나 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누구나 다 배고프지 않고 음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병든 사람은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아이들은 제 때에 배울 수 있도록, 모든 가정이 다 화목할 수 있도록,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운명을 의논할 수 있도록, 남․북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북한동포를 살릴 수 있도록,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각자 자신의 일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불국사를 지을 때 불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기쁨으로 불사에 동참했듯이, 이 나라 백성들 다 기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도울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우리가 기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민족의 관세음보살이 되어 봅시다.

마음이라는 영화 이야기

마음이라는 영화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갔다.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여름 방학 때를 맞이하여 유령의 집을 만들었다고 하여 가족들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재미있는 행사나 놀이거리가 그리 흔치 않았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온 몸이 쭈빗 서고 비명을 지르며 여기 저기 도망 다닌 기억이 난다. 유사한 경험이 또 있었는데 군에서 유격 훈련 받을 때 마지막 날 했던 담력 훈련이 있었다. 밤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껌껌한 숲속을 더듬 더듬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덥석 잡아 기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지금 다시 그 담력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갑자기 놀라게 하면 또 자지러지게 놀랄 것이다.

해마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극장가에는 우리의 온 몸을 싸늘하게 해주는 공포영화 한 두 편이 개봉된다. 점점 내용이나 효과 면에서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분명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무서운 대목에서는 저절로 몸이 움츠려 들게 만든다. 어렸을 적 즐겨 보던 전설의 고향과 문득 비교를 해보지만 요즘은 정말로 무서움을 느끼게 영화를 만든다.

아무리 무서운 공포 영화지만 정작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나 배우가 그 영화를 볼 때 그리 공포심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내막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떻게 분장하여 무슨 효과를 입혔는지 훤히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내심 즐길 것이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무서워해야 할 장면에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공포 영화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듯 만약 우리도 우리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꿰뚫어 알고 있다면 감정과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들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을 수 있다.

흔히 우리들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 느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우리들은 감정과 생각 등이 일어날 때 그 내용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과 장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과도 같다.

통찰(반야) 명상에서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상태나 느낌의 상태를 직시한다. 마음의 내용이나 느낌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마음이나 느낌이 어떤 모습인지 즉 어떻게 일어나 반응하고 있는 지를 보게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통찰하는 힘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는 만큼 어떤 상태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

통찰력이 계발되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느낌 등을 여러 조건과 작용의 복합적인 한 형태로 이해해서 보게 된다. 가령 화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고 하자. 일반적으로는 화가 난 상태에 빠져 버리거나 최소한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화를 잘 낸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이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내가 화를 내게 되었나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통찰의 수준으로 화를 내고 있고 상황을 본다면 현재 화나는 작용이 몸과 마음을 토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 그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여러 조건들을 토대로 또한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통찰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는 우선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어나 작용하는 상태를 보게 된다. 느낌이나 생각이 오온 즉 물질의 무더기, 감각 작용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정신적인 반응과 작용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에 불과하다는 차원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더기 들이 무수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매순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이와 같은 통찰의 차원으로 냉철하게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제작자가 영화를 보듯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대하게 된다.

내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발생하고 있는 상태를 보고 알기 때문에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에 크게 영향 받지 않게 된다.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시켜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를 유지하여 공포나 괴로운 상태를 잠시 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통찰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이해한 순간부터 이해한 만큼 마음은 가벼워 진다.

상윳따 니까야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 천신이 부처님을 뵈러 와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려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청정도론 1권 p121~122에서 재인용)

무슨 사연이 있길래

무슨 사연이 있길 래 긴 밤 울고 있는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양평 인근에 있는 산에서 이틀 동안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명상이 끝난 후 차 마시는 시간 각자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때 화제가 되었던 것이 명상 시간 내내 울어대고 있는 어떤 이름 모를 새였다. 차 마시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울고 있는데 다들 새소리에 문외한 들이라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뻐꾸기나 부엉이 소리 보다는 짧고 그렇지만 굵고 깊은 톤으로 구슬프게 울어 대는 소리였다.

아무튼 저 새가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왜 우는 지에 대한 결론은 한결 같았다. 제 짝이 될 새를 기다리느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새는 다음 날 아침 공양시간 까지 밤 새 쉬지 않고 울어댔다. 아침 공양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그 새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나 목이 아플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리 구슬프게 울어댈까?’ 새소리 때문에 각자 명상 시간 내내 의문이 절로 들었지만 그냥 이리 저리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일상 교무님이 쓴 ‘마음의 등불’이라는 책을 보면 야명조(夜鳴鳥)이야기가 나온다.

밤이면 밤마다 숨이 넘어갈 듯 애절하게 우는 새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밤에만 우는 새라하여 야명조(夜鳴鳥)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야명조가 슬피 우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집이 없기 때문에 추위에 떨려서 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의 울음이라 한다.

야명조의 울음 소리는 ‘내일 해가 뜨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을 만들어야지, 내일 해가 떠오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부터 마련해야지’하는 탄식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해가 떠오르면, 밤을 지새우며 울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먹이를 먼저 찾아 헤매이게 되고, 먹을 것을 먹을 만큼 먹으면 식곤증과 졸음이 겹쳐 잠깐 잠을 잔 뒤에 집을 만들어야지 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다보면 그만 자신도 모르게 석양이 가까울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말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집을 만들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저녁의 먹이를 찾아 헤매이기도 바빠야 하는 결과를 낳아 다시 저녁을 맞게 되고, 다시 밤을 맞아 추위에 떨면서 울어야 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한다.

가끔 외국을 여행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있다. 귀국하면 반드시 영어 학원 등록해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 그 다짐은 마음 속에 흔적 조차 없어진다. 두 달 후 독일에서 개최되는 한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정이 왔다. 다시 영어 공부라는 화두가 생각났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갔다 와서 해야겠다고 다시 미루어 본다. 아마도 야명조의 운명처럼 나에게 이생에서의 영어공부는 미루다가 끝나버릴 것 같다.

영어 공부도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우리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미루고 산다. 막상 무슨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모르고 살겠지만 후회와 탄식할 일이 남아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스님들 끼리 모여 차담을 나누는데 어떤 노스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스님이 출가 한지 얼마 안 되었을 한 창 포교에 대한 열의가 충만해 있었다. 그 스님은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천일 기도를 들어갔다. 기도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포교를 잘 하려면 큰 도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포교 도량 불사를 시작하였다. 몇 번의 천일 기도를 거쳐 시골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짓고 하여 꽤 큰 도량을 건립하게 되었다.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는데 어느 덧 그 스님의 연세는 칠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스님에게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젊은 제자에게 그 절을 물려주어 포교의 원력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그 절이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라서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았는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 운영비가 만만치 않게 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장소도 시골이라 연세 드신 불자 분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나니 절에 오는 신도도 줄어 들고 불사 중심으로 사찰을 운영하다 보니 기존의 신도분들도 지쳐서 더 이상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포교라는 큰 뜻을 가지고 시작한 불사가 결국은 건물 유지라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 마저도 여의치 않자 노쇠한 스님은 절을 매각하여 그 돈으로 작은 토굴하나 마련하여 남은 여생을 수행만 하다 죽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무언가 많은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또 그 야명조 이야기와 함께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불교용품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천도재를 잘 지내기로 유명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스님 말씀에 따르면 요즘은 귀신이 사람보다 더 많아 졌다고 한다. 귀신이 많아 져서 음기가 더 강해지고 그래서 나라도 편치 않고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한다. 내가 ‘스님같이 분이 천도재를 많이 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큰절에서도 천도재 많이 지내고 있는데’라고 물었다.

그 스님 말씀이 요즘은 귀신들이 너무 뺀질거린다고 한다. 왠만해서 재사로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부터 뺀질거려서 죽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웃으게 소리로 듣고 말았지만 만약 그 귀신들이 있다면 아마 야명조의 심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갈까? 나 자신부터 오늘 하루를 다시 생각해 본다.

견공들의 색즉시공

견공(犬公)들의 색즉시공

해가 길어진 탓인가 저녁 공양을 마치고 산책을 나가면 아직 대낮처럼 여겨진다. 직장 같다 퇴근하는 사람들과 학생들로 골목길이 좀 더 분주해져 보인다. 젊은 부부가 작고 예쁜 애완견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강아지들 하는 짓이 귀여워 내 산책길도 자연스럽게 강아지들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있다 나와서 그런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를 무슨 바쁜 일이 있는 듯 연신 뛰어다닌다. 계속해서 땅에 무슨 흥미로운 것이 있는 듯 땅에 대로 코를 벌름거리며 두 마리의 강아지는 서로 경쟁하듯 앞서 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런 와중에 전봇대나 가로수 나무가 나오면 빠트리지 않고 다가가 뒷발 하나를 들고 찍 오줌을 갈긴다. 그런 후 다시 뒷발로 흙이나 땅을 쳐내듯 오줌 눈 곳을 향해 발길 질 한다. 발을 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흙으로 자신의 흔적을 덮어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는 일어날지 모르나 별 소득 없이 발바닥만 닳아 지는 것 같다.

앞에 지나가는 몸이 흔적을 남기면 으레 뒤따라가는 녀석도 같은 곳을 먼저 냄새 맡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자취를 묻힌다. 어떤 경우는 오줌발이 빗나가 엄한 곳에 오줌이 묻었는데도 별 관심 없는 듯 그냥 습관적으로 뒷발 몇 번 튕기고 쏜살 같이 앞에 가는 놈을 추월하느라 내달린다.

명승 고적지나 해외 문화 유산 등을 가보면 한글로 써진 낙서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이 곳에 왔다 감을 기념하기 위해 나름대로 흔적을 남긴 것들이다. 어떤 곳은 바위에 새긴 경우도 있고 굵고 진한 페인트로 칠한 경우도 있다. 낙서를 쓴 사람을 우리는 모른다. 아마도 당사자 외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곳에 왔다 갔음’을 오래 도록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거나 본인의 흔적이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욕심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싶다.

개들이 나무나 전봇대에 실례를 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다. 누구의 소유라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여긴 내꺼야’라는 생각에 최대한 많이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느라 분주히 옮겨 다니고 집에 다시 들어가야 할 때가 되면 아직 해야 할 일을 많이 남겨 둔 체 떠나기 싫은 세상을 떠나는 사람처럼 깊은 아쉬움을 지닌 체 끌려 들어가다 시피 한다.

정말로 열심히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놓았건만 절대로 안심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나무와 전봇대의 주인은 수십 번 바뀐다. 그 다음 날이 되면 개들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무수한 흔적들을 발견할 것이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의 흔적을 더해 나도 이곳의 주인임을 확인 시킨다. 어떻게 보면 마치 공동 소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들은 아마도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분명 본인의 영역이 맞는데 다른 개들이 자꾸 침범을 해와 자신의 영역임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다고 서로서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영역 표시가 개들한테는 무척 중요한 일과임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중요한 일을 거르게 되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개들에게 생길 것이다. 본인들의 재산이라고 강력히 믿고 있는데 그러한 재산을 누군가에게 뺏긴다거나 또 더 넓은 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 자신은 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 할 것이다.

동네 나무와 전봇대로 표시되는 개들의 영역은 개들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기르는 개가 표시한 영역을 다른 개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그런 친절한 주인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인간들은 인간들 나름대로 그 땅에 대한 저마다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산다. 거기에 개들의 영역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개들의 눈에는 그러한 인간들의 소유 개념이 또한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개들의 세상에 인간이 침범하고 사는 건지 아니면 인간들의 영역에 개들이 침범하고 사는 건지 규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서로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믿고 산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는다.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스님, 지금처럼 수행을 하면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한 노보살님이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하시다가 물으셨다. 마음을 내어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무엇이 되는 걸까?’ ‘내가 지금 진정으로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무언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수행을 하다 보면 공부가 되든지 아니면 좋은 업이라도 쌓이겠지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막막해 지고 뭐가 뭔지 감을 잡지 못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이 옳은 건지 아니면 이렇게 해서 무엇하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장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시작은 했는데 금방 포기하기는 그렇고, 공부는 해야 될 것 같고 해서 그냥 관념적으로 수행에 임하기도 한다.

“글쎄요, 무엇이 된다기 보다는 그냥 자신을 좀 더 알게 되겠지요”

“그러면 만약 내가 나를 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보살님은 처음 무엇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셨나요?”

“잘 살아보고 싶어서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더 잘 안다면 그만큼 잘 살아가겠지요”

“나를 잘 아는 것하고 잘 사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노보살님은 벼르고 오신 것 마냥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셨다.

“보살님, 제가 한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 촛불이 켜져 있다고 합시다. 촛불이 켜져 있으려면 최소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아마 성냥, 초, 심지, 공기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예, 맞습니다. 촛불이 켜져 있으려면 최소한 성냥이나, 초, 심지, 공기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더 자세히 언급하면 초를 만드는 파라핀이나 초를 만드는 공장, 사람 등도 필요하지만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이 네 가지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만약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있지 않으면 촛불이 켜져 있을 수 있을까요?”

“없어요. 전부 다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촛불이 켜져 있기 전에 그 불꽃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요, 오긴 어디서 와요. 성냥에서 만들어져서 심지에 옮겨 진 것이지요.”

“그럼 이 촛불을 입으로 불어 꺼트리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없어지지요”

“촛불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켜져 있으면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촛불은 켜져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즉 공기와 초와 심지가 있을 때만 촛불은 존재하는 것이지 그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촛불은 어떤 조건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절대로 자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변하면 사라집니다. 촛불은 그냥 켜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초를 태우며 존재합니다. 매 순간 연소되는 초가 있기에 촛불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촛불은 매 순간 항상 새로운 촛불입니다.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 지고 있지요. 이것을 불교 용어로 무상(無常)이라 합니다. 또 촛불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체가 없다해서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고 합니다. 대상과 그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그리고 대상과 감각기관이 만나 생겨나는 식(識), 이 세 가지를 조건으로 ‘나’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 현상이 만들어져 지속된다고 합니다. ‘나’는 촛불처럼 그 실체가 따로 있어서 어디서 왔거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조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조건들이 어우러져 접촉(觸)하게 되면 식(識)이 발생하고 이때 느낌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이 느낌의 장난이 지금의 ‘나’가 된다고 합니다.

말이 좀 길어 졌습니다. 즉 명상 수행을 통해 나를 안다는 것은 지금 ‘나’라고 여기는 것이 이렇게 조건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느낌과 감정, 생각 등도 마찬가지로 여러 조건을 통해 단지 발생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조건과 원인이라는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평소 자신을 대하면 불만족스러운 여러 느낌이나 상태 또한 조건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고 크게 영향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만큼 마음은 가벼워 지겠지요. 나를 휘몰아 치는 여러 욕망과 감정 또한 조건을 통해 만들어 짐을 알면 그 순간 더 효과적으로 절제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잘 알며 절제를 잘 하고 산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

“명상을 한다고 바로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숫타니 파타>에 나오는 한 구절 소개시켜드릴게요.”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위대하신 스승님께 여쭙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보아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에 듭니까?”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 어떠한 갈애가 안에 있더라도 확실히 자각하여 그것들을 제거하도록 공부하십시오. 안으로 뿐만 아니라 밖으로 어떠한 현상이든 잘 알 수 있더라도,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사람에게 그것은 소멸이라 불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라고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받더라도, 자기를 내세우는 허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안으로 평안해야 합니다. 밖에서 평안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안으로 평안하게 된 사람에게는 취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버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바다 한 가운데에서 파도가 일지 않고 멈추듯, 멈추어서 결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든 파도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숫타니 파타>, 전재성 역 pp445~446 , ‘서두름의 경’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방법

자등영 법등명 - 법륜스님

세상을 살아 가는 가르침

Freedom - The Path to Happiness

법문 동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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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스님 - 달마 어록 (영어)

청안스님 선불교 이야기 (영어)

현각 스님 금강경 법문 (영어)

알기 쉬운 반야심경 - 법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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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스님 한국어 법문 - 회광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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